전투 이전 – 유목민의 등장

1037년, 중앙아시아는 가즈나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다. 마흐무드의 영광스러운 정복 이후, 그의 후계자 마스우드 1세가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제국 변경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셀주크 투르크멘들이었다.
이들은 원래 오구즈 투르크 부족 연합에 속한 키니크 씨족이었다. 셀주크 베그라는 족장이 이끌던 이 집단은 10세기 말부터 시르다리야 강 유역을 배회하며 용병으로, 때로는 약탈자로 살아왔다. 가즈나 왕조는 이들을 변경의 불안 요소로 여겼지만, 동시에 군사력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투르크멘들은 화살처럼 빠르고, 늑대처럼 집요하며, 바람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당대 페르시아 연대기 기록
하지만 셀주크의 손자들인 투그릴 베그와 차그리 베그 형제는 더 이상 용병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호라산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정착민들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마스우드는 더 이상 이를 방치할 수 없었다.
1035년부터 소규모 충돌이 이어졌다. 가즈나군은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투르크멘들은 패배해도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유목민 특유의 전술이었다.
단다나칸 전투의 전개
1037년 5월 23일, 메르브 근처 단다나칸 평원에서 운명의 전투가 벌어졌다.
마스우드 1세는 약 5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왔다. 중장기병, 전투 코끼리, 그리고 인도에서 징집한 보병들까지. 가즈나 왕조의 군사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반면 투그릴 베그와 차그리 베그가 이끈 셀주크군은 정확한 숫자가 전해지지 않지만, 대략 20,000~3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경기병이었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다.
전투 초반
가즈나군이 먼저 공세를 취했다.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중앙 돌파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인도에서 여러 번 성공을 거둔 검증된 방식이었다.
하지만 투르크멘들은 정면 충돌을 피했다.
그들은 양측으로 흩어지며 기마궁수 특유의 회전 사격을 시작했다. 파르티안 샷(도망치면서 뒤돌아 쏘는 기술)을 구사하며 가즈나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코끼리들은 화살에 맞아 혼란에 빠졌고, 중장기병은 빠른 유목민 기병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전투 중반 – 포위의 시작
몇 시간의 소모전 끝에 가즈나군의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투르크멘들은 고전적인 유목민 전술인 “허구 후퇴”를 사용했다. 도망치는 척하다가 추격군을 유인한 뒤, 갑자기 돌아서서 포위하는 방식이다.
차그리 베그가 이끈 우익이 먼저 가즈나군의 좌익을 무너뜨렸다. 이어서 투그릴 베그의 중앙군이 밀고 들어왔다.
전투 후반 – 궤멸
오후가 되자 가즈나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마스우드 1세는 측근들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전멸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전투는 셀주크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의미 – 새로운 제국의 탄생
단다나칸 전투는 단순한 전술적 승리가 아니었다. 이는 중앙아시아 권력 구조의 완전한 재편을 의미했다.
즉각적 결과:
- 가즈나 왕조는 호라산을 완전히 상실하고 인도 지역으로 후퇴
- 셀주크 투르크는 메르브, 니샤푸르 등 주요 도시 장악
- 투그릴 베그, 공식적으로 술탄 칭호 사용 시작
장기적 영향:
- 투르크계 유목민이 이란 고원의 새 주인으로 등극
- 페르시아 문명과 투르크 군사력의 결합 시작
- 향후 400년간 지속될 투르크-이슬람 문명권 형성의 기초
흥미로운 점은 셀주크가 정복자이면서도 파괴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바로 페르시아 관료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이슬람 문화를 적극 후원했다. 칼로 정복했지만, 통치는 펜으로 한 것이다.
전술적 분석
왜 가즈나군은 패배했을까?
| 요소 | 가즈나군 | 셀주크군 |
|---|---|---|
| 기동성 | 낮음 (중장비) | 높음 (경기병) |
| 지형 활용 | 평원 정면전 선호 | 광활한 공간 활용 |
| 전술 유연성 | 고정적 대형 | 분산-집중 반복 |
| 보급선 | 긴 보급선 필요 | 유목민 자급자족 |
마스우드의 실수는 투르크멘과 평원에서 싸운 것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 셈이다. 성곽이나 좁은 지형에서 싸웠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현대 군사학자들의 평가
최근 연구들은 단다나칸 전투를 “유목민 전술의 완벽한 교과서”로 평가한다. 특히 기동성과 화력을 결합한 방식은 몽골 제국의 전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Q&A
Q1. 셀주크군이 수적으로 열세였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었나?
A. 수적 열세는 맞지만, 전술적으로는 우위였다. 가즈나군의 중장기병과 코끼리는 인상적이지만 느렸다. 반면 셀주크 기마궁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화살을 퍼부었다. 마치 권투에서 헤비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잡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Q2. 가즈나 왕조는 이후 어떻게 되었나?
A.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 인도 북부로 중심을 옮겨 1186년까지 약 150년을 더 유지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은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로는 지역 강국에 머물렀다.
Q3. 투그릴 베그와 차그리 베그는 형제인데, 권력 다툼은 없었나?
A. 놀랍게도 없었다. 투그릴이 서쪽(이란-이라크)을, 차그리가 동쪽(호라산-중앙아시아)을 맡는 식으로 영역을 분담했다. 차그리가 1060년 죽을 때까지 두 형제는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Q4. 이 전투가 실크로드 무역에 영향을 주었나?
A. 단기적으로는 혼란을 겪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활성화되었다. 셀주크는 통일된 정치권력 아래 중앙아시아-중동을 연결했고, 이는 무역로의 안정에 기여했다.
필자의 생각
단다나칸 전투를 연구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것이 단순한 “야만인의 침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셀주크 투르크는 정복 이후 곧바로 페르시아 문명을 받아들였다. 마치 로마를 정복한 게르만족이 로마 문화를 흡수한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무력으로는 투르크였지만,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이슬람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어쩌면 이것이 셀주크가 몽골과 달리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일지도 모른다. 파괴만 하는 정복자는 한 세대를 넘기기 어렵다. 하지만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정복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투그릴 베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마치며
단다나칸 평원의 모래바람 속에서,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가즈나의 영광은 사라지고, 셀주크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투그릴 베그는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었지만, 그의 진짜 야망은 더 서쪽에 있었다. 바그다드, 그리고 칼리프의 보호자라는 지위.
그 길을 닦을 인물이 곧 등장한다. 알프 아르슬란이다.
다음 편 예고
“사자 같은 영웅”이라는 뜻의 알프 아르슬란. 투그릴의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그는 셀주크 제국을 진정한 강대국으로 만들 인물이다. 비잔틴 제국마저 무릎 꿇린 그의 이야기를 다음 편에서 만나보자.